위기를 좋아하는 슬기로운 댄서

아무리 발레단의 역사가 깊다고 해도 젊음을 우선시하는 발레의 속성을 바꾸지는 못한다. 세계적인 콩쿠르를 석권하는 영재들의 출현이 빈번해졌고 공개 오디션을 통한 캐스팅이 일반화되면서 ‘등급이 높고 연륜이 많다는 것’이 더는 통용될 수 없게 됐다. 발레 무대에서 무용수들의 전성기 연령이 더 빨라지고, 젊고 신선한 용모와 신체가 우선시되면서 무용수의 생명은 더 짧아지고 있다. 올해로 서른다섯 살이 된 유니버설발레단 수석 무용수 강민우의 여름을 더 혹독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그러나 강민우는 이 위기를 느긋한 미소로 넘기며 카메라를 응시한다. 여전한 젊음을 뿜어내면서 말이다. 

“마흔 살 한계점까지 아직 시간이 좀 남았으니까요. 오래 춤추기를 희망하지만 더 중요한 건 모두를 탄복하게 할 춤의 경지에 오르는 일이죠.” 

힘을 주지 않아도 잔근육이 도드라져 보이는 강민우는 무대 위에서 찬란한 무용으로 관객의 탄성을 이끌어내지만 무대 뒤에선 부상의 후유증에 진저리를 치곤 한다. 왼쪽 발목은 인대 하나가 끊어진 지 오래며 양쪽 무릎의 연골도 찢어지고 마모돼 의료진은 수술을 종용하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민우는 팽팽한 근육의 힘과 막강한 지구력에 기대어 더 높게 점프하고, 더 빠르게 회전한다. 몸에 칼을 대는 날이 무대를 떠나는 날이라 여기며 수술과 재활로 짧은 무용수의 시간을 도려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인생이란 나를 믿고 가는 것! 

배우는 도식적인 연기를 우려해 거울을 보며 연습하는 것을 기피한다지만 무용수들은 다르다. 아름다운 동선, 정교한 동작, 자연스러운 표정을 만들기 위해 늘 거울 속 자신을 살피며 춤을 춘다. 힘들어 얼굴을 찡그리거나 깊은 숨을 몰아쉬는 감춰야 할 모습은 거울이 뒷모습을 비추는 동안 다 해결한 후 순식간에 관객을 위한 표정으로 바꿔버린다.  

아홉 살에 발레에 입문한 이래 춤에 심취하고 테크닉에 열과 성을 다하는 마음가짐은 지금껏 변함이 없다. 그러나 나이 먹고 결혼해 아들까지 생기게 되자 생활은 발레에 고정된 그의 시선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 또한 달라져야 한다는 걸 알게 됐다. 오늘 입은 연습복을 내일도 그대로 입어야 모래 본 공연에서 실수하지 않는다는 오랜 루틴을 스스로 깨뜨리는 날, 자신이 강박에 휩싸여 춤을 추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됐다. 발레를 좀 더 가볍고 편안하게 대해야 자신의 삶이 자유로워진다는 현타가 그를 진정한 ‘어른 무용수’로 거듭나게 했다. 춤 너머로 춤을 바라봐야 한다는 생각, 몰두하되 춤에 갇혀서는 안 된다는 결심이 오랜 정체를 뛰어넘는 도약대가 된 것이다. 

은퇴의 시간이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지만 발레리노 강민우는 두려울 게 없다. 이제 춤이 무언지 알게 됐으며, 그것을 알기까지의 과정에서 경험한 슬픔과 환희, 고통과 희망이 스스로를 믿게 하는 동아줄이 됐기 때문이다.

춤을 잘 추는 사람은 노래도 잘 부를 것 같다.

“꼭 그렇지만은 않다. 하나를 잘하는 사람은 열을 잘한다는 속담이 있지만 그건 잘못된 속단일 뿐이다. 원체 높은 음을 따라가지 못하는 데다 복잡한 리듬에도 취약해서 흥얼대거나 허밍을 하는 경우도 없다. 다만 음악을 듣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 연습실에서 음악에 맞춰 춤 동작을 이어가는 것 외에도 차에서든 집에서든 늘 93.1 Mhz–클래식 FM을 켜 놓는다. 지금 흐르는 음악이 쇼팽의 녹턴인지 슈베르트의 소나타인지 의식하지 않고 그냥 흐르는 공기처럼 놔둔다. 하지만 공연에 사용되는 음악이나 듣는 순간 매료된 음악은 반복해서 들으며 선율이 어떻게 춤동작과 융합되는지를 헤아린다. 날카로운 바이올린 음률 아래로 흐르는 부드러운 첼로 사운드나 멜로디를 더 입체적으로 만드는 하프의 울림을 발견하는 일이 즐겁다.” 

하늘이 높아지고 녹음도 짙어지는 여름을 좋아할 것 같다.  

“여름을 가을, 겨울만큼 좋아할 순 없다. 늘 땀을 흘리며 춤을 춰야 하는 무용수들에게 여름은 가장 힘든 계절이다. 차가운 아이스커피를 보약처럼 마시며 35℃에 이르는 고온에 도전해 보지만 마룻바닥이 양철지붕처럼 뜨거워지는 무더위 속에선 점프도 회전도 집중도 기대 이하가 되고 만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처럼 조용한 나무 그늘 아래서 눈을 감은 채 여름을 나고 싶다. 하지만 올여름 내내 <잠자는 숲속의 미녀>로 8개 지역 투어 공연을 가야 한다. 부산, 창원, 대구 등 매주 먼 도시로 여행 가는 게 기대도 되지만 20년 가까이 번들대는 얼굴로 여기저기를 다니다 보니 여름이란 말만 들어도 절레절레 고갯짓을 하게 된다.”  

발레를 통해 무엇을 극복했다고 생각하나. 

“극복이란 말은 좀 거창하다. 오랜시간 무대에 서면서 내 신체의 핸디캡에 대해 편안해지게 됐다. 마른 체형에 쭉 뻗은 몸 선을 갖고 있지만 두 다리만큼은 발레에 이상적인 모양이라고 할 수 없다. 발레를 하기 위해선 다리의 안과 밖이 곧은 일직선을 유지해야 하는데 내 무릎은 쫙 펴진 것도 아니고 바깥으로 살짝 휘어 있는 데다 관절도 꺾여 있어 근사한 라인을 만드는 데 한계가 있다. 절망적인 수준은 아니지만 엉성한 다리 선을 무대 위에서 감추느라 꽤나 애를 먹었다. 지금은 적당한 근육을 통해 메우게 됐지만 여전히 신경 쓰는 부분이다.”  

컨디션 유지를 위해 어떤 건강 관리법을 갖고 있나.

“테크닉이 정점에 오른 건 좋은데 그만큼 체력은 하향세를 보인다. 20대에는 아는 건 없지만 몰아치는 연습과 공연에도 팔팔함을 잃지 않았는데 지금은 힘에 부쳐서 제대로 된 연기와 모션을 해내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런 안타까움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가급적 누워 있는 상태로 심신을 편안하게 하는 시간을 갖는 편이다. 반신욕도 즐긴다. 부드러운 물속에 들어가 있으면 중력의 영향으로 짓눌렸던 신체 여기저기가 확실히 편안해지는 것을 느낀다. 또 마지막 단계에서 하는 찬물 샤워는 피로한 근육을 되살리는 좋은 테라피가 된다.” 

유니버설발레단이 40주년을 맞았다. 긴 역사를 갖고 있는 발레단의 강점은 무언가.

“예술의전당이나 세종문화회관처럼 거대하진 않지만 발레단의 스튜디오와 극장이 있는 유니버설아트센터는 오래된 건물 특유의 정취가 어려 있다. 오밀조밀해서 답답한 감도 있지만 곳곳에 숨어 있는 공간이 많아 정겹기까지 하다. 온종일 뛰고 점프하고 밸런스까지 유지해야 하는 무용수들에게 혼자서 쉴 수 있는 공간은 위안 그 자체다. 나는 주로 체력단련실 한쪽에 있는 카우치에서 시간을 보내곤 한다. 클래스와 레슨 일정이 엄청난 탓에 체력단련실은 늘 한산해서 내 차지가 되는 소파에 등을 묻고는 뛰는 심장과 놀란 근육을 달래곤 한다. 40년의 긴 시간 속에서 연습실과 극장은 무용수들의 생활공간, 댄서의 집이 됐다.” 

헤어&메이크업 정샘물인스피레이션 EA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