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베니도스!(Bienvenidos·환영합니다)”

지난 2월 24일 스페인의 이름난 휴양지 메노르카섬에 있는 사기타리오 플라야 호텔. 호텔 문이 열리자, 호텔리어들이 환하게 웃으며 손님을 향해 이렇게 인사말을 건넨다. 그런데 호텔에서 일하는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니 이들 국적이 전 세계에서 몰려든 관광객 국적만큼이나 다양하다. 이 호텔 관리자인 아바드씨는 “우리 호텔엔 콜롬비아, 페루, 베네수엘라, 도미니카공화국, 이탈리아 등에서 온 직원들이 함께 일한다”면서 “원래는 관광객들이 여름에만 몰렸지만 요즘엔 연중무휴 쏟아지며 외국인 근로자를 고용해 부족한 일손을 메우고 있다”고 했다.

스페인은 유럽 경제 강국(독일·영국·프랑스·이탈리아)들이 지난해 0~1%대 ‘저성장의 늪’에 빠져 있을 동안 3.1% 경제성장률을 일궈냈다. 시사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경제성장률과 증시, 물가, 실업률 등을 종합한 결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7국 중 지난해 가장 뛰어난 경제 성과를 보인 나라 1위로 스페인을 꼽기도 했다. 이에 스페인 현지 경제 전문 매체인 《더 비즈니스 이어(The Business Year)》 기자와 함께 대도약 중인 스페인 경제를 심도 있게 분석했다.

 포인트1 스페인을 살린 노동 개혁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농장 지대엔 매해 가을이면 90일짜리 단기 일자리를 구하러 모로코나 콜롬비아 등에서 일꾼들이 몰려든다. 스페인에선 농번기 등 일거리가 갑자기 늘어나는 시기에 90일까지 외국인 임시 근로자 고용을 허용했는데, 최근 일거리를 찾는 외국인 발길이 더 늘었다. OECD 등 글로벌 경제 기관들 역시 스페인 경제 소생의 비결로 노동 개혁을 꼽는다. 그동안 높은 실업률은 스페인 경제를 갉아먹는 고질병이었다. 스페인의 실업률은 2007년까지만 해도 8.2%였는데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수직 상승하더니 2013년에 26.1%까지 올랐다. 5년 만에 실업률이 세 배로 치솟은 셈이다. 더구나 같은 해 청년 실업률은 55.5%에 달하는 등 노동시장이 사실상 붕괴 수준이었다.

스페인은 이 같은 노동시장을 수술하기 위해 강도 높은 개혁에 나섰다. 2021년 통과된 노동 개혁 법안이 대표적이다. 이 법안은 스페인 기업들이 근로자들을 마구 해고하지 못하게 하는 대신 사정에 따라 근로시간 단축 등 유연한 근로제를 더욱 강화해 시행토록 한 게 핵심이다. 근로자의 권리를 보호하면서도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확보했다는 평가다. 그 결과, 스페인의 실업률은 2020년 15.3%에서 지난해 2분기 기준 11.3%까지 떨어졌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스페인 2021년 노동시장 개혁 효과’란 제목의 보고서에서 “(노동 개혁으로) 특히 젊은 근로자(15~24세)가 가장 큰 수혜를 봤는데, 이 나이대 근로자들의 임시 고용 비율이 2023년에 2021년 대비 20%포인트 넘게 떨어졌다”고 설명했다. 주요 기관들은 또 외국인 근로자를 스페인 노동시장에 숨통을 트이게 한 ‘1등 공신’으로 꼽는다. 스페인의 외국인 근로자 수는 2014년 184만명에서 꾸준히 올라 지난해 320만명에 이르렀다. 10년 만에 74%가량 늘어난 수치다. 외국인 근로자는 그 규모가 늘었을 뿐 아니라 경제활동 참여도 크게 늘었다. 스페인 BBVA은행에 따르면 2019년 4분기부터 2024년 3분기까지 스페인 국적 고용 인구는 9% 늘어난 반면 스페인 내 외국인 고용 인구는 39% 늘어났다. 2024년 3분기만 놓고 봐도 스페인 전체 고용 인구 증가분의 75%는 외국인이 차지했다. 외국인 근로자가 스페인 경제의 새로운 주축으로 떠오른 셈이다.

스페인 노동시장에선 실업률 하락과 외국인 근로자 유입에 힘입어 총 근무 시간이 늘면서 생산성도 같이 올라가는 기(奇)현상까지 벌어지고 있다. BBVA은행은 “스페인은 역사적으로 근무 시간이 늘어나면 생산성은 떨어져 왔는데, 최근 2년 동안 총 근무 시간이 늘어나면서 시간당 생산성이 같이 높아지는 일이 일어났다”며 “이는 외국인 이민자 유입과 생산성 향상이 스페인의 경제성장 잠재력을 높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통상 총 근무 시간이 길어지면 생산성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스페인에선 외국인 근로자들이 장시간 일하면서도 많은 일을 해내며 근무의 양과 생산성이란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았다는 해석이다. 특히 외국인 근로자가 유럽 주요국의 최대 난제인 노동 인구 고령화 해소에도 기여했다는 평가다. 글로벌 리서치 전문 기업인 캐피털 이코노믹스는 《파이낸셜타임스》에 “스페인은 외국인 노동력 덕분에 유로존의 다른 지역만큼 생산력 향상에 제약이 걸리지 않았다”며 “스페인 기업들 입장에선 외국인 근로자들이 많이 유입된 덕분에 임금 상승을 억제시킬 수 있었다”고 했다.

 포인트2  10년의 결실, 디지털 스페인

최근 아빌라·세고비아 등 스페인의 지방 도시에선 전봇대마다 일꾼들이 올라가 안테나를 설치 작업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스페인 정부가 발표한 ‘디지털 어젠다 2025’에 따라 현지 통신사들이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5G(5세대 이동통신) 기지국을 증축하면서 벌어지는 풍경이다. 성과는 이미 나타나고 있다. 

스페인 현지 매체 《RCR와이어리스 뉴스》에 따르면 스페인 최대 통신사인 텔레포니카는 지난달 기준 스페인 인구의 90% 이상에 5G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5G 서비스 출시(2020년 9월) 4년여 만에 5G 도달 범위를 사실상 스페인 전역까지 넓혔다는 얘기다. 공공 서비스의 디지털 전환 작업도 한창이다. 스페인 정부는 2022년 약 40개의 사회 복지 혜택을 조회하는 등 각종 행정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종합 민원 앱 ‘나의 시민 폴더’를 내놓았다. 시청 등 관련 시설을 찾아 일일이 서류를 작성해야만 해결할 수 있었던 행정 업무를 스마트폰에서 클릭 몇 번 만에 처리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이처럼 국가 체질을 디지털 기반으로 확 바꾼 결과가 스페인 경제 성장의 발판이 됐다는 분석이다. 《이코노미스트》는 지난해 12월 ‘스페인, 유럽에 미국 경제를 따라가는 방법을 보여주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스페인에선) 10년 전 개혁이 첨단 기술의 성공이란 결실을 보고 있다”며 “스페인 경제성장의 일부는 테크 기업과 컨설팅 기업 등의 비(非)관광 서비스 수출에서 비롯됐다”고 진단했다. 실제로 스페인 정부는 2013년부터 ‘디지털 스페인 어젠다(Digital Agenda for Spain)’를 내놓고 디지털 경제·사회 발전으로의 변신을 시작했다. 네트워크 설비를 깔아 통신 서비스망을 구축하고, 정보통신기술(ICT) 전문가를 양성한다는 등의 정책을 마련해 본격 시행했다. 

스페인의 ICT 시장 성장 전망도 밝은 편이다. 글로벌 시장조사 기관 모도 인텔리전스에 따르면 스페인 ICT 시장은 2025년부터 2030년까지 연평균 7.46%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포인트3  태양과 바람의 나라

남유럽 스페인은 풍부한 일조량 덕에 종종 ‘태양의 나라’라 불린다. 이 천혜의 조건 덕분에 스페인 바르셀로나·마드리드 등 주요 도시에 솟아오른 고층 건물 옥상엔 태양광 패널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실제로 지난해 스페인이 다른 유럽 주요국들과 달리 높은 경제성장률을 달성할 수 있었던 배경엔 ‘에너지’ 부문 역할이 컸다. 그동안 유럽 주요국은 러시아 송유관을 통해 천연가스를 공급받아 왔다. 하지만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자 러시아가 유럽에 가스 공급을 차단했고, 이는 유럽의 ‘에너지난’으로 이어졌다. 유럽 내 에너지값이 급등하고 기업의 생산 비용 부담도 커졌다. 특히 러시아산 원유 의존도가 높았던 독일의 경우 갑작스레 공급망을 재편해 원유를 비싼 값에 들여오게 됐고, 결국 에너지 가격 급등으로 인한 고물가 현상까지 나타났다. 반면 스페인은 다른 국가들에 비해 국내총생산(GDP)에서 제조업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았다. 러·우 전쟁으로 인한 에너지 공급 감소 타격이 상대적으로 덜했다는 뜻이다. 더구나 스페인의 재생에너지 산업 발전은 에너지난 충격을 막는 버퍼 역할을 했다. 스페인은 유럽 내에서 최고 수준의 일조량과 풍력을 갖춘 재생에너지 요충지로 꼽힌다. 스페인 중앙은행 관계자는 “2019년에 스페인의 풍력 및 태양 에너지 발전량은 전체 발전량의 26% 수준이었는데, 지난해 40% 이상으로 늘어났다”며 “2024년 상반기 기준 스페인의 전기 도매 가격은 2019년에 비해 40% 넘게 낮아졌다”고 설명했다.

앞으로도 재생에너지 분야는 스페인 경제의 버팀목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재생에너지 발전량이 꾸준히 늘어 기업 활동 부담이 줄고, 물가 안정에도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페인 나바라대의 크리스티나 파르도 교수는 “스페인은 풍력 및 태양 에너지 장기 투자로 외부 에너지 수입 의존도를 줄이는 등 에너지 안보를 강화할 수 있었다”며 “(스페인은 재생에너지 산업을 통해)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기록하며 투자자들의 신뢰도를 높일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포인트4   태양 아래 금맥, 스페인 관광업

지난해 스페인의 ‘경제 성적표’가 좋았던 것은 스페인 GDP의 13%를 차지하는 관광업이 ‘흥행 초대박’을 냈기 때문이다. 스페인 산업관광부에 따르면 지난해 스페인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은 사상 최대치인 9400만명을 기록했다. 스페인 인구(약 4800만명)의 거의 두 배에 달하는 해외 인파가 스페인으로 몰렸다는 얘기다. 성장세도 가파르다. 스페인의 외국인 관광객 수는 2022년 7150만명, 2023년 8500만명에 달했는데 이제는 ‘관광객 1억명 시대’를 코앞에 뒀다. 유럽 최고이자 세계 최고 관광지인 프랑스(1억명)에 버금가는 수치다.

스페인을 찾는 관광객들은 씀씀이도 커졌다. 지난해 스페인의 외국인 관광객의 총지출은 2023년(1080억유로) 대비 16.6% 늘어난 1260억유로(약 190조원)에 달했다. 같은 기간 관광객 수가 10.5% 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관광객 수보다 소비 증가세가 더 가팔랐다는 얘기다.

스페인 산업관광부 관계자는 “스페인은 관광 상품의 품질을 끌어올리고 상품 종류도 다각화하는 데 관광 산업 초점을 맞추고 있다”며 “관광업은 일자리 창출과 지역 발전에 직접적으로 이바지하고 있다”고 했다.

 포인트5  탄탄한 내수 시장

주요 경제 기관들이 내다보는 스페인 단기 경제 전망은 밝은 편이다. 관광업의 호황, 디지털 경제의 가속화, 재생에너지 성장 등에 힘입어 형성된 탄탄한 내수 시장은 향후에도 스페인 경제에 선순환을 일으킬 것이란 분석이다. OECD는 지난해 12월 내놓은 ‘OECD 경제 전망’ 보고서에서 스페인 경제가 2025년 2.3%, 2026년 2.0% 성장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OECD는 “탄탄한 내수 시장이 스페인 경제성장의 근간”이라며 “강한 회복력을 보이는 노동시장, 가구당 가처분 소득 및 저축 증가로 민간 소비는 계속 강세를 유지할 것”이라고 했다. 관광업과 재생에너지 등 스페인의 경제성장 ‘주역’들이 더 많은 일자리를 창출해내고, 스페인 국민 지갑이 두둑해지면서 스페인 경제가 계속 활기를 띨 것이란 얘기다.

오태현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선임연구원은 “스페인은 경제 위기 속에서 부동산과 관광업에 치중됐던 산업 구조를 다각화하는 데 성공했다”며 “다른 유럽 주요국들에 비해 성장 동력이 많고, 정치적으로도 안정된 상태라 스페인은 당분간 견조한 성장을 이어 갈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