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여행 - 제주

저지리 예술 투어하고 저지오름 오르고… ‘제주시 뉴저지’를 아시나요?

글 : 박근희 조선일보 기자  |   사진 : 장은주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미국 뉴욕 맨해튼의 스카이라인을 담을 수 있는 ‘해밀턴 파크’는 없지만, 제주 산방산 일대의 스카이라인을 내려다볼 수 있는 ‘저지오름’이 있다. 뉴저지의 이름난 해변인 ‘와일드우드(Wildwood)’나 ‘벨마 비치(Belmar beach)’는 없지만, 제주에서도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협재’와 ‘금능’ 해변이 차로 15분 거리에 있다. 언젠가부터 ‘제주시 뉴저지’라 불리는 한경면 저지리가 요즘 젊은 층과 키즈맘들 사이에서 ‘뉴저지’란 애칭으로 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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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부가 새롭게 선정한 ‘이달의 생태 관광지’에 ‘저지곶자왈’과 함께 이름 올린 ‘저지오름’.

 

‘제주시 뉴저지’의 원조를 찾아서


“이 마을에서 통용되는 말은 아니지만, 미술관을 방문하는 젊은 관람객들 사이에서 들어본 적은 있습니다. 제주에서도 비교적 조용한 마을인데 익살스러운 애칭이 생겼다니 긍정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창호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장은 미술관이 자리한 저지리가 최근 뉴저지라 불리는 데 대해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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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 뉴저지’라는 애칭의 원조라고 하는 ‘뉴저지김밥’.

저지리는 제주 한경면과 안덕면의 경계를 이루는 마을 이름이다. 한라산과 가깝고 부근에 유명 관광지 ‘오설록티뮤지엄’ ‘제주항공우주박물관’ ‘생각하는 정원’ ‘제주신화월드’ 등과 제주국제학교가 있어 제주 서쪽이나 서귀포 여행을 하다 보면 오며 가며 지나게 되는 산간 마을이다.


뉴저지란 애칭은 ‘누군가 재미 삼아 부르기 시작했다’는 설, ‘영어교육도시와 가까운 저지리에 타운하우스가 생기며 이곳에 사는 젊은 엄마들 사이에서 만들어졌다’는 설, ‘창고 개조 카페인 뉴저지카페에서 처음 썼다’는 설 등이 있지만, 이름의 원조로 알려진 곳은 뜻밖에 따로 있다. 저지리사무소와 저지오름 진입로 부근에 있는 아담한 분식집 ‘뉴저지김밥’이다. 

 

뉴저지(New-jeoji)김밥이라 쓰인 간판을 달고 9년째 분식집을 운영하는 이영임(66)·장시수(71)씨에 따르면 “2016년 ‘뉴저지김밥’으로 상호를 등록하며 뉴저지란 이름을 처음 썼다”고 주장한다. 부부는 “처음엔 저지리 마을의 이름을 따 ‘저지리 김밥’이라고 하려고 했는데 ‘저지리’라는 어감이 경상도 사투리 ‘저지리(어지르다는 뜻)’, ‘저질’처럼 들리기도 한다고 해 저지리를 새롭게 바꿔보자는 뜻에서 영어로 ‘뉴(New)’를 붙여 ‘뉴저지’로 하게 됐다. 하지만 미국의 뉴저지(New Jersey)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설명했다. 

 

이후 더욱 알려지게 된 건 창고형 카페들이 유행하던 2017년 무렵 이 분식점 단골이던 청년들이 인근 창고를 개조해 카페를 열면서 ‘뉴저지카페’란 간판을 달았고, 이 길을 지나다니며 이를 본 젊은 여행객들 사이에서 ‘뉴저지’로 불리게 됐다는 설이 설득력 있다.

 

저지리(楮旨里)의 옛 지명은 ‘닥몰’ ‘닥모로’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한자 차용 표기로 닥나무 저(楮)에, ‘모로’ ‘마르’의 한자 훈 표기인 지(旨)를 조합해 쓰이게 됐다. ‘저지리 향토지’ 편찬위원으로 참여한 이 지역 토박이 강공수(80)씨는 “저지리란 이름은 닥나무가 많은 마을이라는 뜻”이라며 “저지오름이나 저지예술인마을 등 저지리 곳곳엔 닥나무 군락이 흔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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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이야기를 간직한 ‘비밀의 숲’ 같은 제주시 한경면 저지리 ‘저지곶자왈’.

 

날것의 제주 숲 ‘저지곶자왈’


애칭만 재미있는 게 아니다. 제주에서도 비교적 덜 알려진 저지리는 제주의 축소판이라 할 정도로 제주다운 것들이 모여 있다. 환경부 선정 ‘이달의 생태 관광지’의 첫 테이프를 끊은 곳도 저지곶자왈과 저지오름이다. “저지곶자왈과 저지오름은 기후변화에 따른 온실가스를 흡수하는 탄소 흡수원 역할을 하며, 제주의 생명수인 지하수를 만들어 주는 곳으로 제주도 내에서 유명하지만, 대중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관광지”라는 설명이다.


저지곶자왈은 제주 올레길 14-1코스(9.3km)와도 일부 겹친다. ‘곶자왈’은 제주어로 ‘숲’을 뜻하는 ‘곶’과 ‘나무와 덩굴 따위가 뒤엉켜 수풀같이 어수선해진 곳’을 뜻하는 ‘자왈’ 즉 ‘어수선한 숲’을 뜻한다. 정리되지 않은 자연스러운 숲. 저지곶자왈 역시 날것의 제주 숲과 만날 수 있는 장소다.

 

이 숲에선 깊게 주름 팬 나무, 아무렇게 뿌리 내린 풀, 함부로 드러누운 이끼 그리고 계획 없이 자리 잡은 작은 생명체들과 조우하는 기쁨이 가득하다. 꺾인 나뭇가지, 그 사이를 파고든 이름 모를 풀들을 천천히 둘러보면서 시간의 치유력을 배워가기에 충분하다. 



‘저지오름’ 분화구 관찰


‘닥몰오름’ ‘새오름’ 등으로도 불리는 저지오름은 제주 내 350여 개 오름 중 탐방로를 통해 분화구를 관찰할 수 있는 오름이다. 동네 뒷산의 숲 산책로를 걷는 기분이다. 저지오름 주차장에 차를 세운 뒤 20분쯤 걸어 올라가면 정상에 닿기에 남녀노소 부담 없이 도전할 만하다. 방향에 따라 저지오름 둘레길 코스, 정상둘레길, 저지오름 전망대 코스를 선택할 수 있다. 가장 긴 저지오름 둘레길 코스가 1.6km이니 둘러보기 만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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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화구관찰로가 있는 ‘저지오름’. 260여 계단을 내려가면 분화구 관찰 전망대가 나온다. 깔때기 형태의 분화구 안쪽에 닿으면 사방이 막힌 풍경에 묘한 고립감이 느껴진다.

 해발 고도 239m, 비고 100m인 오름의 정상에 있는 산불 감시 초소 전망대는 현재 보수와 안전을 위해 일반인의 출입을 막아놓았다. 아쉬운 대로 전망대 바로 아래 나무 계단을 따라가면 분화구 관찰로가 나온다. 무려 260여 계단이 쉴 새 없이 이어지니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갈 일이다.


기원전 25만~20만 년 전에 형성됐다는 분화구는 둘레 800m, 지름 225m, 깊이 62m 규모의 화산체로 깔때기 형태다. 아직 초봄이라 건초 덤불과 나뭇가지들이 쌓여 있는 풍경이지만 실망하기엔 이르다. 주변을 파노라마뷰로 살펴보면 사방이 막힌 원시적 풍경에 묘한 고립감이 느껴진다. 강공수씨는 “과거 수십 년 전엔 분화구 밑에서 유채, 보리, 감자를 재배했다”며 “봄부터 가을까지 야생화도 관찰할 수 있다”고 했다. 하산할 때 칠성단 이정표 쪽으로 방향을 잡아 걸으면 아담한 전망대가 눈에 들어온다. 숲으로 둘러싸인 오름에서 탁 트인 전망을 선사한다. 맑은 날엔 산방산, 송악산까지 눈에 들어온다.



길 잃어도 좋을 저지문화예술인마을


저지오름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저지 문화 지구가 있다. 우리나라 다섯 번째 예술인마을인 ‘저지문화예술인마을’을 비롯해 제주현대미술관,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 문화예술 공공수장고 등이 모여 있어 ‘예술 투어’가 사계절 이어진다. 저지문화예술인마을이 조성된 지 20여 년 됐으나 2022년 ‘저지 문화 지구 활성화 계획’이 수립되며 요즘 ‘뉴저지’에 대한 기대감이 일고 있다.


여기에 재일교포 건축 거장 이타미 준(유동룡)의 건축 세계를 조명하는 ‘유동룡미술관(이타미 준 뮤지엄)’이 개관하며 한층 활기가 더해진 분위기다. 유동룡미술관 측은 “개관 후 시간별 예약제로 운영하고 있는데 작년 한 해에만 3만2000여 명이 다녀갔다”고 전했다. 관람객 중엔 저지 문화 지구를 중심으로 제주 건축 투어와 미술 투어를 이어가는 이들도 많다고. 유동룡미술관은 지난해 ‘한국건축가협회 건축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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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지문화예술인마을이 있는 저지 문화 지구의 무게 중심이 되는 ‘제주현대미술관’. 입구에 닿으면 최평곤 작가의 설치 작품인 ‘여보세요’가 마중 나온다. 2 ‘물방울 화가’ 김창열 화백의 생애와 작품을 깊이있게 만날 수 있는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 3 ‘제주 한국화의 풍경: 사인화담(四人畵談)’전을 여는 제주현대미술관. 전시 첫날 찾은 관람객들이 바깥 풍경과 이어지는 듯한 건식벽화 ‘세화-팽나무’를 관람하고 있다.

 

저지문화예술인마을의 무게 중심이 되는 제주현대미술관 본관도 2014년 제주도와 제주관광공사가 선정한 7대 건축물 중 하나다. 바로 옆 ‘회(回)’ 자 모양의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까지 건축 투어만 해도 하루로는 부족하다. 제주현대미술관은 주변 자연 생태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야외 조각공원을 비롯해 김흥수 아틀리에, 문화예술 공공수장고 등을 갖추고 있다. 지난 3월 8일부터 ‘제주 한국화의 풍경: 사인화담(四人畵談)’(~6월 30일)전을 열고 있다. 바깥 배경과 연결된 대형 건식벽화 작품 ‘세화-팽나무’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제주 출신 오기영, 이미성, 조기섭, 현덕식 작가가 색다른 기법으로 해석한 한국화를 소개한다.


변시지의 작품을 몰입형 미디어아트로 만날 수 있는 문화예술 공공수장고의 ‘황금빛 고독, 폭풍의 바다’(~4월 21일)도 볼 만하다. 박공지붕 건물 내부는 사방이 미디어아트 스크린이 돼 관람객이 그림 속으로 들어간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제주현대미술관 주요 시설과 야외 조각 작품, 저지문화예술인마을을 둘러보는 앱 ‘AR문화예술여행 저지에서 걷다’를 스마트폰으로 내려받아 활용하는 것을 추천한다. 어린이 조각 공원에서 ‘신종 생물’ 작품 등을 스마트폰으로 비추면 흥미롭게 반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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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지리 마을 안쪽에 자리잡은 책방 ‘소리소문’.

 

소리 소문 없이 자리잡은 책방·카페들


제주시 뉴저지 여행은 이쯤에서 끝이 아니다. 조용한 마을 안쪽에 최근 몇 년 사이 책방과 카페가 하나둘 들어서고 있다. 우스개로 “소리 소문 없이 문을 열었다”는 얘기를 듣는 ‘소리소문’은 여행책 <오늘이 마지막은 아닐 거야>를 펴낸 정도선(42)·박진희(42)씨 부부가 2019년 문을 연 책방이다. 소리소문(小里小文)은 ‘작은 마을에 작은 글’이라는 뜻. “작지만 알곡 같은 활자와 책이 널리 널리 퍼져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었다”고 한다.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엄선해 놓은 책방은 최근 벨기에 란누 출판사 선정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세계의 서점 150’에 등록됐다. 한국 서점 중 최초로 이름을 올렸다고. 다시 마을을 돌아 나오는 길, 버스 정류장 이정표가 이 작은 마을의 존재감을 알린다. 월림리와 청수리 사이에 ‘저지리’가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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