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빛과 소금 된 천록담의 노래들     

2019년 시작된 <미스트롯>과 <미스터트롯>이 만들어낸 트로트 부활의 역사 속에서 천록담은 입지전적 인물로 통한다. 시즌별 현역부·타장르부 참가자 중 최고 성적을 냈으며, 정미애(2019년·1대-선), 홍자(2020년·1대-미), 영탁(2020년 1대-선) 등 40대 이상의 Top3 출신 중에서도 마흔네 살로 가장 연장자다. 새 얼굴, 신진 세력을 우선하는 경연 과정에서 그는 출중한 가창력 하나만으로 마스터와 시청자를 감동시키며 결정적 순간마다 반전을 끌어냈다. 검은 피부, 탄탄한 골격, 힘이 실린 목소리 등 그의 외형은 긴장과 압박을 두려워하지 않는 타고난 승부사로 보이지만 실제 내면은 그 반대다. 상처투성이의 물러 터진 마음을 싸안고 부르는 노래가 더 많은 호소력과 친화력을 만들어내며 그를 스타덤에 올라서게 한 것이다. 

백두산 천지에서부터 한라산 백록담까지 사랑과 낭만, 인생을 노래하는 가수가 되겠다는 포부가 담긴 이름, 천록담! 많은 이가 알고 있는 대로 그는 천록담이 되기 전까지 이정이라는 R&B 가수로 20여 년을 활동했다. 우여곡절도 많고 공백도 길었지만 ‘다신’ ‘나를 봐’ 등 20대 리즈 시절 그가 불렀던 솔과 레게 스타일의 곡은 두꺼운 팬층을 만들어냈다. 허스키하면서도 큰 울림이 있는 그의 창법은 김건모와 비교됐으며, 스티비 원더의 ‘Lately’ ‘You Are the Sunshine of My Life’를 리드미컬하게 부르던 방송 장면은 지금도 유튜브의 인기 영상으로 분류되고 있다. 

세월 베고 다시 노래 위에 서서 

그는 오늘의 자신이 있기까지 결정적인 계기로 ‘세월 베고 길게 누운 구름 한 조각’이란 노래를 처음 대하던 순간이라고 얘기한다. 나훈아가 작곡한 이 노래는 삶의 무게를 담담히 받아들이며 잠시 쉼을 갖는 마음의 여유를 담은 곡으로, 천록담의 음악적 변신의 출발점이자 재기의 발판이 된 곡이다.  

15년 전 R&B 가수의 삶에 좌절해 다시는 노래를 부르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떠났던 제주에서의 새 생활. 그러나 카페 오픈도 펜션 사업도 실패로 이어지며 그를 더욱 암담하게 했다. 이 와중에 만난 지금의 아내는 그를 고립무원의 세계로부터 빠져나오게 한 동반자였으며 절대적인 지지자가 됐다. 

술자리에서 부른 트로트 한 소절에 감탄한 아내는 서울의 경연장을 향해 그의 등을 떠밀었다. 주변에선 ‘세월 베고 길게 누운 구름 한 조각’을 경연의 1순위 곡으로 꼽았고, 그 또한 자신의 삶을 이 노래가 응축해 내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제는 잘하려고 하기보다 즐기려고요.” 긴 방황 끝에 진정한 자신을 찾은 가수, 천록담. 그의 노래는 여전히 절절하고 애틋하지만 갈망이 아닌 평안으로 가득 차 있다. 상처를 치유한 사람만이 낼 수 있는 다정하고 자유로운 음색, 그 진심 어린 목소리는 ‘이정의 리턴’이 아닌 천록담이라는 이름이 만든 새로운 결실이다.

마흔네 번째 가을을 보내는 즐거움에 대해 들려주세요.

“아내가 제주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 제 거처로 합류해 오랜만에 함께 걷고 식사도 하며 부부다운 생활을 시작했는데 지역 축제와 행사 무대 스케줄이 몰리면서 다시 독신남 생활을 하고 있어요. 오늘은 ‘봉화송이축제’ 내일은 ‘칠곡낙동강평화축제’ 모레는 ‘청도 프로방스 빛축제’ 식이어서 서울로 복귀하지 않고 행사장 근처 호텔에서 지내는 경우가 많거든요. 아내와 다시 떨어져 지내는 건 아쉽지만 팬 여러분의 뜨거운 응원과 호응에 가을의 풍성함이 이런 거구나 실감하고 있죠.”

봉화·칠곡·청도 등 자연 경관이 뛰어난 곳에 가면 제주도 생각이 더 많이 나겠어요.

“15년을 제주에서 지낸 이유로 고개 들면 보이던 애월 바다와 군산 오름을 더는 볼 수 없다는 게 아직도 익숙하지 않아요. 서울이든 지방이든 어디를 가나 사람과 건물로 꽉 차 있는 풍경에 답답증이 생겼다고나 해야 할까요. 바다와 오름뿐인 고요하고 드넓은 제주가 매일 그립죠. 제주의 자연 속에서 천록담다운 공연을 해보고 싶어요.” 

천록담의 노래는 암을 떨쳐낸 사연을 빼놓고서는 완성될 수 없다고 볼 수 있는데요. 신장암의 발병과 쾌유가 자신의 음악에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나요.

“오랜 시간 음악에 대한 절망과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으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그 응어리가 신장암을 불러온 셈이죠. 다행히 초기 단계여서 항암 치료 없이 수술만으로도 좋은 예후를 얻을 수 있었어요. 퇴원 전날엔 오래 자고 깨어난 것처럼 몸이 개운해졌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이 세상을 다시 살게 됐으니, 이제부터는 보너스 타임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그렇다면 못 할 게 뭐가 있겠나 싶었고 그 후론 사는 일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을 더는 느끼지 않게 됐죠.”

미(美)가 아니라 진(眞)이 됐더라면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나요. 

“경연 출전의 목표는 진선미에 오르는 게 아니라 음악의 스펙트럼을 트로트로 확장한 천록담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 있었어요. Top3, Top7에 들지 않았다 해도 저는 별 아쉬움 없이 트로트 가수의 길을 이어갔을 거예요. 아내를 비롯한 가족들의 격려에 힘입어 재기를 하게 됐고 23년의 R&B 가수 경력을 저 스스로 내려놓고 결정한 일이니까 더욱 소중할 수밖에요. 결과보다 더 중요한 건 노래와 무대에 대한 제 진심이니까요.” 

하루 일과 중 온전하게 자신만을 위해 쓰는 시간은 언제인가요. 

“잠들기 전에 머플러나 수건으로 목을 감싸곤 하는데 목이 따뜻해지면서 전신이 편안해지는 걸 느끼곤 하죠. 또 기억에 남는 가사나 잠언을 수첩에 적곤 하는데 문제를 해결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종이 위에 글씨를 쓰는 동안 해결책이 떠오르곤 하니까요. 복잡하게 여겨지던 다음 날 스케줄도 잘 정리가 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