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불 직격탄 맞은 ‘고운사’는 지금

“어제 다녀가고, 오늘 또 왔습니다. 뉴스로만 보던 화재 현장에 직접 와 보니 더 안타까워 재건을 기원하는 기도라도 올리려고 합니다.”

4월 말 경북 의성 고운사를 찾은 70대 부부는 기와 불사 (1만원)를 하고 기왓장에 소원을 적었다. ‘고운사가 하루빨리 재건되길 기원합니다.’ 사찰 곳곳에선 동국대 WISE 캠퍼스 불교 동아리 학생들과 총장, 교수 등 140여 명이 조를 나눠 자원봉사 활동을 하고 있었다. 불타 버린 전각과 계곡 주변의 폐목을 수거하거나 연등 200여 개를 설치하고, 기와 2000여 장을 운반하며 복구에 힘을 보탰다. 

예년 같으면 이맘때 탐방객들로 붐볐을 고운사는 요즘 종단 관계자나 불자로 보이는 이들만 드문드문 발걸음 할 뿐, 조용하다 못해 썰렁한 분위기다. 고운사 종무실장은 “화재 소식이 전해지고 산불 발생 초반엔 많은 국민이 관심을 가졌으나 시간이 지나며 발길이 뜸해졌고 최근엔 대한불교조계종 종단 관계자나 순례객들 위주로 찾고 있다”고 했다.

신라 신문왕 때 의상대사가 등운산 자락에 창건한 고운사는 지난 산불로 대웅보전, 명부전, 삼성각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과 문화유산이 전소하거나 훼손되는 등 막대한 피해를 봤다. 그중엔 국가 지정 보물도 다수 포함돼 있다.

마을 초입부터 화마가 할퀴고 간 흉터가 역력하다. 고운사로 이어지는 3㎞의 ‘천년숲길’을 수놓던 소나무와 단풍나무는 밑동이 검게 그을리거나 탄 채로 서 있다. 나무엔 빠른 복구와 재건을 기원하는 플래카드를 걸었다. 앙상하게 뼈대를 드러낸 ‘최치원문학관’을 지나 산문 앞에 서면 이제 막 녹음의 계절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푸른 나무 사이로 헐벗은 등운산이 눈에 들어온다. 소나무 일부는 산불이 내뿜은 뜨거운 열기로 퇴색돼 있었다.

경내에 들어서자마자 전소한 ‘가운루’를 보곤 탄식이 터지기도 했다. 가운루는 ‘연수전’과 함께 고운사의 대표 보물. 운치를 더했던 전각들의 모습은 눈앞에서 사라지고 돌무더기와 잿더미로만 남았다. 기둥은 숯으로 변해 버렸고 기왓장은 산산조각 났다. “범종마저 깨뜨릴 정도로 불길이 어마무시했나 보다”라는 한 탐방객의 말에 곁에 있던 고운사 관계자는 “불길이 사찰 둘레를 에워쌌다. 대웅보전이 안 탄 게 신기할 정도”라고 했다.

대웅보전 앞마당은 새 연등으로 채워지는 중이다. 이번 경북 산불로 고운사 가운루와 연수전을 비롯해 국가 지정 문화유산 11건, 도 지정 문화유산 20건이 피해를 봤다. 다시 고운사를 나서는 길, 늠름한 자태를 뽐내던 소나무에 ‘산불 피해로 치료 중인 나무입니다’란 종이가 눈에 띈다. 하얀색 동그라미가 쳐진 나무들은 곧 베어질 예정이다. 고운사를 찾은 한 스님은 “아름다운 가을 단풍과 어우러진 풍경을 다시 보기까지 얼마나 걸릴지…”라며 한숨지었다.

화마 피한 점곡면 사촌리 향나무, 가로숲

고운사 천년숲길을 빠져나오면 창밖으로 산불 피해를 본 농가들이 이어진다. 무너진 집과 축사, 창고는 그대로 방치돼 있다. 눈앞에 펼쳐지는 산들은 얼룩덜룩한 색감이 가득하다. 고운사가 자리한 단촌면과 인접해 있는 점곡면도 피해가 컸던 지역. 500여 년 수령의 천연기념물 ‘사촌리향나무’와 ‘사촌리가로숲’의 안부를 확인할 차례다.

강풍을 타고 점곡면 방향으로 불길이 번지면서 이곳 역시 비상이 걸렸으나 사촌리향나무와 사촌리가로숲은 다행히 ‘안녕’하시다. 만취당 골목에서 높이 8m의 압도적인 자태를 자랑하는 사촌리향나무는 조선 연산군 때 학자 송은 김광수가 심었으며 ‘만 년 동안 푸르게 살라’는 의미로 만년송이라 불렀다고도 전해진다.

가까이 있는 사촌리가로숲은 고려 말에 안동 김씨 김자첨이 안동에서 지금의 사촌마을 자리로 이주한 후 바람을 막고자 조성한 방풍림. 이 숲엔 수령 300~600년의 상수리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등 500여 그루가 연둣빛 새순을 틔워내며 완연한 봄 풍경을 자랑하고 있다. 바람이 숲을 지나가는 소리, 새소리를 들으며 숲을 거닐다 보면 새삼 오랜 세월 한자리에 있어준 숲에 대한 고마움이 느껴진다. 사촌리가로숲을 출발점 삼아 ‘점곡둘레길’을 걸어볼 만하다. 고택이 모여 있는 사촌마을을 시작으로 미천을 따라 의성국가지질공원의 명소인 점곡퇴적층까지 둘러볼 수 있다.

‘의성 고분군’에 작약이 피기까지

안평면과 안계면에서 동시다발로 발생한 산불은 의성의 많은 지역에 흉터를 남겼지만, 피해 지역에서 한발 떨어져 있는 금성면 고분군은 어느새 초록빛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전체 370여 기의 고분군은 경북 북부 지역의 최고(最古), 최대 규모로 삼한 시대 국가였던 조문국의 도읍지가 이곳에 존재했음을 알리는 사적지다. 고분에서 발굴·출토된 유물 등을 전시한 ‘조문국박물관’을 비롯해 ‘민속유물전시관’ 등이 서로 가까이 모여 있어 역사 체험뿐 아니라 나들이 코스로도 알려진 곳이다.

큰 규모를 자랑하는 ‘경덕왕릉’을 비롯해 고분을 둘러볼 수 있게 탐방로를 잘 조성해 놓았다. ‘면작기념비’ 부근에 있는 ‘조문정’은 고분군 전망대나 다름없다. 고분 중심에 작약 군락(4200㎡)이 펼쳐져 있어 5월 중순 이후 방문하면 고분과 붉은 작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새로 조성한 ‘제2 주차장’ 부근에는 들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자원봉사 여행객’ 찾는 안동

청송 주왕산국립공원도 산불이 옮겨붙은 지 사흘 만에 전체 면적(1만 610㏊)의 약 30%에 해당하는 3260㏊가 소실됐다. 수백 년 수령의 노송뿐 아니라 봄철 등산객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던 어린 철쭉나무들도 타버렸다. 탐방객이 줄어 헐렁해진 주왕산국립공원 주변으론 일찌감치 문 닫은 상점들도 눈에 띈다.

주왕산국립공원공단 측은 “대표 관광특구인 대전사와 기암교, 용추폭포, 주산지 구간은 온전한 모습이나 산불 여파로 그곳들마저 탐방 수요가 부쩍 줄었다. 산불 발생 후 주산지만 부분 개방했던 한 달간 탐방객이 지난해의 3% 수준인 700명 정도뿐”이라고 전했다. 사진·영화 촬영 명소인 조선 시대 저수지 ‘주산지’는 여느 때보다 고요하다. 기념사진 찍으려고 줄을 서던 왕버들 전망대도 본의 아니게 ‘독점’이다. 안동 상황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촬영지로 더 유명해진 조선 시대 누각 ‘만휴정’은 ‘방염포의 기적’으로 화를 면했지만, 주변 피해가 커 초입부터 ‘통행 금지’ 테이프가 둘러쳐져 있다.

하지만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자리한 묵계서원은 재개방했다. 묵계서원 옆 ‘카페 만휴정’과 로컬 여행 스타트업 ‘히어로’ 대표인 박대진 안동시관광협의회 이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동안 인스타그램으로 문화유산 재건과 복구를 함께 하는 자원봉사 여행, 볼런투어(volunteering과 tour를 결합한 단어)를 기획했는데, 게시글을 올린 지 며칠 만에 150여 명이 신청했다”고 전했다.

여행객들은 만휴정과 묵계서원의 재 가루를 닦아내고 마룻바닥에 동백기름칠을 하거나 주변을 정리하는 데 참여했다. 박 이사는 “안동 시민에게는 관광객이 찾지 않는 게 산불만큼 무섭다”며 “자원봉사 여행에 대한 문의가 많아져 확대해 나갈 예정”이라고 했다.

‘다시 경북’ 찾는 캠페인 전개

영양을 거쳐 영덕까지 이어진 산불의 기세는 바다를 만나고서야 꺾였다. 영덕 경정항은 특히 어민들의 피해가 컸던 곳. 이전까지는 방탄소년단(BTS) 뮤직비디오 촬영지로 유명했다. 이맘때면 등대 아래에서 바다낚시를 즐기던 발걸음도 뚝 끊겼다. 

여행 성수기에 접어들며 관심이 더욱 필요할 때, 경북도와 경북문화관광공사는 산불 피해 지역 관광 회복 프로그램인 ‘Re:Tour, 지금 경북으로’를,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는 ‘여행+동행 캠페인’을 추진하고 있다. 산불 복구에 집중했던 지자체도 팔을 걷어 올렸다. 안동시는 관광 택시 이용 시 기존 혜택에 더해 할인을 해주고, 청송군은 소규모 여행객들에게도 관광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캠페인을 전개한다. 캠페인 이름은 ‘여행이 곧 기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