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에서 모두 이루리라! 

서른세 살, 정유지가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의 여주인공 마리아 역을 열연하며 뮤지컬 데뷔 10주년의 궤적을 분명히 하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의 노력이 결실의 단계에 이르렀음인지 올 한 해 그녀는 박스오피스 3부작에 자신의 이름을 차례로 올리며 마침내 스타덤의 영예를 얻게 됐다.   

지난봄엔 <노트르담 드 파리>의 에스메랄다 역을 6년 만에 재연하며 스스로 많은 성장을 했음을 확인했고, 한여름엔 원톱 히로인 무대인 <베르사유의 장미>의 오스칼 역에 도전해 주역의 입지를 다졌다. 이제 대망의 2025년이 올 때까지 멀리서 예수를 사모하는 순정한 여인을 연기하며 세기의 넘버 ‘I Don’t Know How to Love Him’을 부를 예정이다. 

인생이 대본대로 굴러갈 수는 없듯이 애초 그녀의 계획에 뮤지컬 배우는 존재하지 않았다. 보컬 트레이너가 되기 위해 실용음악과에 입학했지만 열아홉 살엔 엔터테인먼트 사무실의 연습생이 되어 아이돌이 되는 것을 새 목표로 삼게 됐다. 하지만 그 우연 속엔 악전고투가 예고된 주사위가 던져져 있었다. ‘JYP 스무살빅마마’로 데뷔하려던 계획은 바람과 달리 속절없이 무산되고 말았다. 이어 소속사를 바꿔가며 결성한 걸 그룹 EXID, 베스티에서도 연이어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 우여곡절이 이어졌다. 

탈아이돌급 가창력에 아름다운 춤선까지 겸비한 정유지에 대해 현장의 프로듀서와 작곡가들은 역대 걸 그룹 메인보컬 중 최고라는 평가를 내리곤 한다. 음색·성량·리듬감·바이브레이션 등 여러 항목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며 스타성을 인정받았지만 불운과 무명이 이어지면서 좌절해야 했다. ‘걸 그룹에 있기엔 노래 실력이 아깝다’ ‘뮤지컬만 하기엔 그 재능이 아깝다’ 등 주변으로부터 ‘아깝다’라는 평을 자주 듣던 시절이었다. 

처음엔 자신을 높게 평가하는 것에 감사해했지만 그다음 순간 사람들로 하여금 ‘안타깝다’ ‘아깝다’를 연발하게 하는 결과를 스스로 만들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하게 됐다. 

그때부터 걸 그룹 출신의 가수와 뮤지컬 배우라는 두 영역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던 자신의 모습에 분명한 목표를 부여해야 한다는 자각을 하게 됐다. 

그 무렵 인기 음악 방송의 출연은 뮤지컬의 스토리만큼이나 깊은 울림을 가져다주며 그녀를 주목하게 하는 특별한 쇼 타임이 됐다. 그녀가 KBS 2TV <불후의 명곡-전설을 노래하다> ‘소찬휘&김현정’ 특집 편에 출연해 빼어난 라이브 실력과 무대 매너를 선보이며 우승컵을 들어 올린 것이다. 걸 그룹 현역 시절에도 못 해본 음악방송의 1위를 <불후의 명곡>을 통해 성취했음이 감격스러워 무대 뒤에서 펑펑 눈물을 쏟던 모습은 많은 이에게 노래 이상의 감동을 가져다주었다.

그 후 그녀는 더욱 강하고 성숙해졌다. 공연에 대한 부담이 커서 극장에선 동료들과 말 한마디 편하게 못 하고 탈이 날까 봐 밥도 먹지 않는 예민함이 여전하지만 극장을 집 다음으로 편안한 장소라고 자신할 수 있게 됐다. 대본을 살피며 배역을 연구하느라 잠을 설치고 쪽잠 속에서 넘버를 부르는 꿈을 꾸지만 그런 안간힘이 자신만의 연료라 여기며 새롭게 주어진 제2의 삶을 힘껏 껴안는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의 배역 마리아는 그간의 배역들과 어떤 차이가 있나.

“마리아는 예수를 진정으로 사랑하지만 그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매우 내성적인 인물이다. 사실 그녀에 대한 정보가 불분명해서 아직도 그녀에 대한 분석이 완벽하진 않다. 그녀의 사랑이 신에 대한 숭배인지 이성에 대한 동경인지 혼동이 될 때도 있다. 그런 미지의 인물을 연기하는 게 어렵기도 하지만 그녀가 어떤 차를 마실지, 좋아하는 색깔은 무엇인지 상상하며 조금씩 다가가는 일이 한편으론 즐겁기도 하다.” 

자신에게 새로운 암시, 커다란 울림을 주는 대사에는 어떤 것이 있나.

“‘난 후회 없이 살았어’라는 문장을 유독 좋아한다. <베르사유의 장미>에서 오스칼이 바스티유 격전 중 총에 맞으며 앙드레의 품에 안겨 전하는 마지막 대사다. 그동안 너무나 많은 후회를 하면서 잘못된 선택에 대해 자책하곤 했다. 후회하지 않는 삶을 더는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게 하고 또 후회할 일을 했다 해도 지난 일을 더는 곱씹지 않겠다는 내 신념의 근간이 되고 있다.”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일은 무언가.

“몇 해 전 미국 여행을 하면서 세상이 넓다는 걸 새삼 확인했다. 차로 몇 시간을 달려도 사라지지 않는 지평선을 바라보면서 세상이 이처럼 넓고 저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분명 있을 텐데 그 비좁은 틈에서 풀리지 않는 일에 매달릴 이유가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뮤지컬에 온 힘을 쏟겠다는 순간이었다.”  

그간 발표한 싱글과 공연 중 불렀던 뮤지컬 넘버 중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뮤지컬 <드림걸즈>의 넘버 ‘리슨Listen’을 꼽을 수 있다. 내 오랜 롤모델 비욘세의 히트곡이다. 그녀에게서 받은 영감과 자극으로 걸 그룹 시절의 고단함을 이겨낼 수 있었으며, 그녀가 맡았던 배역인 디나 존스에 캐스팅되면서 잃었던 자존감의 많은 부분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 노래를 부르면 가사 내용처럼 내 진정한 목소리를 찾는 일의 소중함과 기쁨이 떠올라 삶과 생활에 더 집중하게 된다.”

체력의 한계·관계에서 발생하는 스트레스는 어떻게 해결하나.

“필라테스에서 새로운 에너지를 얻는다. 노래, 춤만큼이나 필라테스를 좋아해서 평소 즐겨 입는 옷도 필라테스 트레이닝복이 대부분이다. 신체의 힘, 유연성, 균형감을 갖는 데 큰 도움이 되며 긴장과 불안감에서 생기는 위축된 마음을 자신감으로 바꾸는 데도 효과적이다. 특히 집중력을 키우게 하는 동작도 많아 배역에 대한 몰입, 감정이입, 무대 동선을 이해하고 기억하게 하는 데 도움을 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