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란 ‘올인 & 보링’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이 대사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허문다. 삶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의 문제를 죽음에 대한 질문으로 뒤바꾼다. 올해로 일흔을 맞은 길용우는 이 둘이 혼재된 상황을 매 순간 마주치고 있다.

지난 9월 연극 <햄릿>의 마지막 회 차가 공연되던 날, 긴장과 전율 속에서 175분이 흘렀다.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는 전무송과 이호재, 박정자, 손숙, 정동환, 길용우 등 연기 경력만 도합 900년이 넘는다는 24명의 배우가 이끈 연극이 기립박수 속에 막을 내렸다. 석 달간 총 85회, 4만여 관객이 <햄릿>을 관람했다. 길용우는 왕좌와 왕비를 빼앗은 햄릿의 숙부 클로디어스 역을 맡아 2막의 첫 장면을 더욱 인상 깊게 만들었다. 선왕인 형을 살해한 죄를 고백하다가 눈을 희번덕이며 “허나 나는… 인간이다! 나는 살고 싶다. 살아야 겠다”고 절규하는 순간, 관객은 그가 전하는 무게감에 짓눌린 듯 숨을 죽였다. “너무 어려워서 매일 밤잠을 설쳐가며 고민하고 또 고민했어요. 그 장면이 꿈에 계속 나올 정도였죠. 길을 걸을 때도 차를 몰 때도 계속 대사를 읊게 되더라고요.” 고뇌를 증명하듯, 그가 내보인 대본 속 이 대사에는 각종 펜으로 그은 밑줄과 메모가 가득했다. 길용우는 약 10년 만에 연극 무대에 섰다. 1975년 연극으로 연기를 시작한 그에게 무대는 기회만 있다면 오르고 싶은 곳이었다. 여전히 무대를 갈망하고 새로운 역할을 꿈꾸는 그에게 관객은 응당 박수를 보냈다. 

최근엔 탁월한 전기수(傳奇叟)로 활약하며 여전한 목소리의 힘을 과시하기도 했다. 오디오북 《길용우가 읽는 박태원의 삼국지》를 출간하며 《삼국지》 정역본을 듣는 재미에 빠져들게 한다. 전기수로서의 그의 역량은 연극 무대에서의 열연에 뒤지지 않는다. 침대에 누워 그가 읽어내는 중국판 《일리아드》를 듣다 보면 십중팔구 밤을 꼬박 새우기 십상이다. 그의 목소리는 사내들의 투쟁과 지략이 넘쳐나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시절로 우리를 이끌며 한수와 낙양, 서촉의 높은 산과 깊은 강을 건너게 한다. 

길용우는 지금껏 배우로 50년을 달려왔다. 다 세기도 어려울 만큼 다작을 했고, ‘톱스타’라는 정점도 찍어봤다. “요즘 사람들은 나를 회장님, 주인공 아버지로만 기억할 것”이라는 그의 말마따나 기세가 한풀 꺾인 듯한 일흔의 배우가 됐지만, 오디션을 거쳐서라도 배역에 도전하고 싶다는 열정은 건재하다. 

“건재할 수 있는 이유? 그런 게 어디 있나. 하면 하는 거지(웃음).”

연극 <햄릿>은 공연 기간만 3개월, 연습까지 더하면 6개월간 열정을 쏟은 작품이었다. 아직도 여운이 있을 것 같다.

“지금 좀 멍한 상태다. 6개월 동안 고정적인 스케줄에 맞춰서 연습을 하고 공연을 하고, 이 패턴이 멈춰버렸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러닝 타임이 세 시간에 이른다. 웬만한 체력으로는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 같다. 

“그렇다. 많이 지친 것도 사실이지만 관객들이 주는 힘이 어마어마했다. 이번에 뮤지컬 배우들이 합류해선지 뮤지컬 열성팬들이 많이 찾아줬다. 무대 앞 ‘오케스트라 피트(무대와 객석 사이 구덩이처럼 팬 공간)’부터 선점하더라. 50회를 본 분도 계시고. 그 관객들이 기립해서 박수를 치니까, 덩달아 뒷사람들이 기립 박수를 쳤다(웃음). 매회 기립 박수를 받게 된 거다. 연극에서 그런 장면이 나오기 쉽지 않으니 너무 좋았다. 오늘 내가 팬레터도 몇 장 받았다. 강필석(햄릿 역), 길해연(거트루드 역), 길용우의 조합을 가장 좋아한다는 젊은 ‘필길길’ 팬이 써줬다.”  

나이 든 배우 길용우에 대해 잘 모르는 젊은 관객이 많았다.

“그래서 내가 이 연극하기 너무 잘했다고 생각한다(웃음). 관람 후기에 ‘별 다섯 개’가 계속 붙는다. 나에 대해서는 “왜 그동안 연극을 안 하셨나요” “계속 연극해 주세요”라는 평이 많다. 더 기분 좋은 것은 “클로디어스가 거트루드를 사랑했기 때문에 선왕인 형을 죽이고 조카인 햄릿까지 제거하려는 악행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고 납득하시는 분들이 많다는 거다.”

고전은 해석을 위한 정답을 찾기가 어려운 것 같다.  

“《햄릿》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중 가장 긴 작품이다. 원작 희곡에는 클로디어스라는 인물에 대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여러 장면이 있지만 연극 무대에선 많이 삭제됐다. 그를 단편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장면은 2막의 첫 장면, 독백뿐이라 여기며 정말 열심히 준비했다. 셰익스피어의 함축된 말들을 내가 관객에게 얼마나 전달할 수 있는지가 중요했다. 클로디어스에 대한 해석은 관객의 몫이지만 그 해석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배우에게 연극은 어떤 의미인가. 

“책임져야 하는 것. 영화와 드라마는 카메라나 감독에 의한 구도로 만들어지잖나. 감독이 배우에게 주문하는 부분들도 있고. 연극은 끊어갈 수도 없으니 다시 한다는 게 없다. 막이 오르면 배우가 온전히 책임져야 한다. 그러니까 연극은 무엇보다 ‘올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연극 한 편을 마치면 몸이 완전히 정화되는 느낌이다. 몸 안에 있던 찌꺼기가 빠져나가고 혈관까지 깨끗해지는 기분. 택시 기사들이 노후된 택시 엔진 내부에 낀 찌꺼기를 처리하는 것을 ‘보링’이라고 한다. 우리도 “보링한 것 같다”고 얘기한다.” 

《햄릿》이 서양의 대표 고전이라면, 그에 앞서 동양의 대표 고전 《삼국지》를 오디오북으로 출간했다. 91시간 29분 분량, 1,223명의 등장인물을 혼자 소화했는데. 그 과정이 꽤나 힘겨웠을 것 같다. 

“일주일에 한두 번, 한 챕터를 녹음하다 보니 1년이 걸렸다. 좋은 인물은 부드럽고 편하게, 악한 인물은 앙칼지고 거칠게, 힘 있는 장군은 무겁고 큰 소리를 내면서 표현했다. 내가 사극을 많이 했고 발음이나 보이스가 정확해서 선정됐다고 들었다(웃음). 덕분에 학창 시절 건성으로 읽었던 《삼국지》를 제대로 정독했다.”  

최근 1년간 고전의 힘을 제대로 느꼈을 것 같다. 

“고전은 ‘고전’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더라. 어느 시대에 갖다놓아도 그 시대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게 하는 힘, 그 힘은 고전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죽음에 대해 생각한 적이 있나. 

“누구나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일이다. 어제도 동료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상갓집에 다녀왔다. 내내 건강하시다가 속이 안 좋아서, 무릎이 불편해서 병원에 갔다가 갑자기 패혈증이 오는 바람에 손쓸 새도 없이 떠나셨다. 인간은 살아 있으면서도 죽은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죽음이 새로운 삶으로 이어질 수 있겠구나 싶다. 우리가 느끼진 못해도 영혼이 항상 주변에 있다고 생각한다. 《햄릿》에서 그랬듯 산 것도 죽은 것이고, 죽은 것도 산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장 좋은 건 고통 없이 편안하게 죽는 거겠지.” 

올해로 일흔이 됐다. 자신의 나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예전 같으면 칠순이 칠순 같았겠지. 요즘 칠순은 과거의 환갑보다도 더 젊은 축에 드는 것 같다. 늙은 것 같지가 않다. 옛날에 70 먹은 아저씨라고 하면 “저 영감 밖에 나와서 뭣하나 집에서 손주나 보지” 했겠지만 지금은 40대 후반에서 50 정도 되려나. 내 마음가짐부터 늙질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