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림과 긴장감은 배우 최고의 재능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의 앙리 뒤프레로 여름을 시작했던 배우 이해준이 이번엔 <베르사유의 장미>의 앙드레 그랑디에를 연기하며 가을을 맞고 있다. 두 공연이 오버랩되던 한동안은 오늘밤은 앙리로, 내일 밤은 앙드레로 살았다. 지난밤 <프랑켄슈타인> 무대의 열연으로 앙리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채 아침을 맞으면, 오늘 밤 공연에서 실수하지 않을까 싶어 <베르사유의 장미>의 대본을 꺼내 읽으며 앙리 뒤프레의 기운을 지워내곤 했다. 한남동 블루스퀘어와 신당동 충무아트센터를 번갈아 다니는 일에 혼선이 오기도 했다. 그때마다 지금 향하고 있는 극장이 스케줄과 다른 게 아닌가 싶어 출연 일정을 재차 확인해야 했다. 차로 15분 거리에 불과한 야트막한 남산 자락을 사이에 두고 있는 두 극장을 실수 없이 찾아가는 일이 만만치 않음을 알게 됐다. 하지만 그건 행복한 고민임에 틀림없다. 스타들에게만 주어지는 동시 출연의 어려움을 경험하고 있으니 그도 분명 스타덤에 올라섰거나 그 지점에 거의 다 왔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배우 이해준은 공연 첫날의 떨림과 긴장감이 마지막 공연까지 고스란히 이어져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그게 버퍼링과 매너리즘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순수하고 한결같은 태도가 도리어 그의 연기를 무겁게 만든다는 지적도 있다. 지나친 절실함은 지켜보는 이에게 부담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비평에 대해 배우 이해준은 매우 영리하고 성숙하게 반응한다. 그런 비평을 고려해 몸에 힘을 빼거나 가벼운 애드리브를 더하지만 그게 최선은 아니라고 말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표현과 진실이 우선이며 그것이 없거나 줄어든다면 그것은 더 이상 이해준의 연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부담을 줄지언정 말이다.   

서른여섯 살, 11년 차 경력의 배우지만 반세기 이상을 극장에서 보낸 노배우만큼이나 배역에 대한 확신과 연기 철학이 분명하다. 연기와 배우론에 관한 질문에 늘 설득력 있는 답변을 내놓으며 그 대답은 무대와 극장을 넘어 우리 삶 전반에 적용해도 될 만큼 지혜롭고 단단하다. 그가 오랜 시간 동안 혼자서 모질게 내공을 쌓고 자질을 키운 배우임을 입증하는 순간이다.

<베르사유의 장미>의 초연 무대, 어떤 매력을 느끼고 있나.

“프로덕션도 배우인 나도 다 처음인 작품이라 서툴고 거칠지만 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흥미롭고 즐겁다. 더욱이 잘 다듬으면 이 작품의 ‘오리지널리티’가 내 것이 될 수 있어서 더 많은 열정을 발휘하게 된다.”   

서른여섯, 자신의 나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마흔이 될 준비를 해야 할 즈음? 모두들 불혹(不惑)에 이르는 것에 두려움을 갖고 있지만 주변의 형, 선배들을 보면 남자는 마흔 살이 돼야 화려해지고 분명해지는 것 같다. 하지만 안정감을 우선시하는 어른이 되기보단 꿈을 좇는 철없는 어른으로 남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그래야 순수하게 배역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모험을 할 수 있는 상상력을 잃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본인의 이름에 대해 어떤 느낌을 갖고 있나.   

“내 본명은 병오다. 그 이름엔 태생적으로 부족한 게 있어서 그것을 채워야 한다며 어머니가 자주 가는 절의 스님에게서 받아 온 이름이다. 함께 해(偕), 법 준(準) 자를 쓰는데 30을 넘기면 잘된다는 풀이를 갖고 있다. 그보단 해준이란 어감 자체가 마음에 들고 관객과 함께해야 하는 내게 꼭 맞는 이름이란 생각이 든다.”   

주 5회 공연하는 강행군을 이어가고 있다. 어떻게 버티고 있나.    

“공연이 끝나면 분장실에 남아 소모된 감정을 되살리느라 멍 때리기도 하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운동을 하는 것이다. 이미 지쳐 있는 상태지만 내일의 컨디션을 위해 땀을 한 번 더 흘리곤 한다.”

옥주현·김지우·정유지, 오스칼을 연기하는 세 여배우와의 하모니에는 어떤 차이가 있나. 

“주현이 누나의 리딩 능력은 상당하다. 힘에 밀리지 않으려는 반응보단 그 안정감을 받아들이는 게 균형을 유지하는 비결이다. 그래서 다른 페어에 비해 좀 더 귀여운 앙드레, 사랑스러운 ‘오스칼 바라기’가 되곤 한다. 그에 비해 지우 누나는 내 존재 자체를 인정해 주는 상대다. 동등한 위치의 편안한 친구라고 해야 할까. 반면 유지는 나보다 한참 어리고 그래서 강인한 내면을 갖고 있는 캐릭터임에도 무언가 더 해줘야 할 것 같고 보듬어주고 싶은 마음이 일게 된다.” 

 

추억의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

창작 뮤지컬로 다시 피어나다

 

“바람 한 점 없어도 향기로운 꽃. 가시 돋쳐 피어나도 아름다운 꽃. 장미, 장미는 화사하게 피고 장미, 장미는 순결하게 지네!” 1993년 KBS 2TV에서 방영됐던 일본 애니메이션 <베르사유의 장미>의 주제가다. 나이 지긋한 이들이라면 30여 년 전 가사를 대하는 순간 아름다운 전율이 흐르는 멜로디를 떠올리며 노래를 부르게 한다. <베르사유의 장미>는 1972년 첫선을 보인 이케다 리요코의 동명 만화가 원작이다. 폭발적 인기에 힘입어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다. 그리고 이번엔 뮤지컬이다! 일본 만화 고유의 리듬 대신 웅장하고 클래시컬한 넘버 ‘이대로 아침까지’ ‘나 오스칼’ ‘나를 감싼 바람은 내게만 불었나’ 등이 이어지며 화려한 뮤지컬의 매력을 절감하게 한다. 

 

딸 부잣집에서 막내딸로 태어났지만 아들로 키워져 왕실 근위대 장교가 된 오스칼과 그녀의 시종 앙드레가 주인공. 프랑스혁명의 격변 속에서 두 남녀는 신분을 초월한 사랑과 자유에 대한 신념으로 관객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배우 이해준은 오스칼만을 바라보는 해바라기, 앙드레 역을 열연한다. 10월 13일까지 충무아트센터 대극장에서 공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