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은 만큼 돌려주는 게 배우의 도리

신영균은 천생 배우다. 아흔을 넘긴 지 오래됐지만 스트라이프 남색 정장에 빨간색 넥타이를 매치하고 새하얀 행커치프를 꽂은 모습은 영락없는 영화배우다. 반듯하게 단장한 헤어는 빛을 내뿜었고 걸음걸이에 흐트러짐도 없다. 나이가 무색하다는 말은 이럴 때 쓰나 보다. 그는 유년 시절부터 배우가 되는 꿈을 키우며 성장했다. 자신을 키운 홀어머니의 반대가 심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졸업 후엔 가출까지 감행하며 2년간 전국을 순회하는 연극 무대에 섰다. 그런데 배가 너무 고팠다. 공부를 다시 해서 서울대학교 치의과대학에 입학했다. 하지만 배우의 꿈은 버리지 않았다. 먹고살려고 치과를 개업했지만 2년을 버티지 못했다. 1960년 서른 살이 넘은 나이에 영화 <과부>(감독 조긍하)로 데뷔했다. 이후 1962년 <연산군>(감독 신상옥), 1964년 <빨간 마후라>(감독 신상옥), 1968년 <미워도 다시 한번>(감독 정소영) 등 300여 편의 영화를 찍으며 당대 최고 스타가 됐다.

그는 영화배우 외에도 손만 대면 대박을 치는 미다스의 손을 갖고 있다. 1970년대 초 명동에 문을 연 우리나라 1호 볼링장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맥도날드를 국내 들여온 것도 그다.

탁월하고 매력적인 슈퍼 에이저(Super Agers)

어느덧 97세 노신사가 된 은막의 스타는 그간 수백억 원을 기부하며 영화와는 다른 방식의 참여를 통해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고 있다. 그의 기부 소식은 사회·문화면의 이슈가 되곤 했지만 대부분은 언제, 얼마를, 왜 했는지 기억을 다 못 할 정도다. 그만큼 자주, 남모르게 나눔을 행해온 것이다.

본격적인 기부는 2006년 즈음 시작했다. 당시 50년간 뒷바라지해 준 아내를 위해 자녀들과 함께 금혼식을 성대하게 준비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호텔에서 하고 어쩌고 하면 억대 비용이 들겠더라고요.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사람들과 나누자고 마음을 먹었죠. 가족들도 다 좋다고 해서 금혼식을 취소하고 불우이웃 돕기에 1억 원을 기부했어요. 어려운 동료 배우를 위해 몰래 지갑을 여는 일이 커다란 기쁨으로 다가왔죠.”

그 뒤로도 통 큰 기부가 이어졌다. 2010년 500억원 상당의 명보극장과 사재 100억원이 들어간 제주의 영화박물관을 사회에 환원했다. 모교인 서울대를 비롯해 명예박사 학위를 준 서강대에도 수십억원을 기부했다.

“손대는 것마다 잘되더라고요. 인생의 유일한 실패는 국회의원 선거에서 떨어진 거였어요. 그때 쓴맛을 본 뒤 나무나 키워야겠다는 심정으로 고덕동에 땅을 사서 집을 짓고 지내게 됐죠. 시간이 지나 그 땅을 기부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고요. 그러고 보면 세상에 이유 없는 일은 없어요.”

그는 2012년 서울대 동문 배우 이순재와 함께 연극 <하얀 중립국>으로 무대에 다시 올랐다. 젊은 시절 열흘이면 외웠을 대사를 한 달이나 붙잡고 있었지만 행복했다. 그 무대가 마지막이 아닐 거라고 했다.

“너무 좋았어요. 옛날 생각이 나면서. 무대에 다시 한 번 올라갈까 생각은 하고 있는데요. 지금도 그냥 배우가 좋아요. 뭘 해서 돈을 벌면 그건 다 기부하고 싶고요.”

여성 팬이 너무 많았죠?

“그 시절엔 집 앞에서 마냥 기다리면서 혈서 쓰고, 자기 몸에 내 이름 썼다고 보여준다고 하고 그런 사람이 많았어요.”

영화 외에도 손을 대는 사업마다 대박이 났고요.

“장사는 극장으로 시작했죠. 1963년 금호동에 2류 극장을 열었어요. 명절 때는 줄이 끝없이 이어졌어요. 영화배우 한 것만큼 돈을 벌었죠.”

우리나라 1호 볼링장도 열었다고요?

“해외 촬영과 국제영화제에 참석을 하다 현지의 볼링장이 성황이란 걸 알게 됐어요. 국내 들여와야겠다 싶어 이런저런 노력을 했는데 허가가 안 나서 감사원의 허가까지 받은 후에야 시작할 수 있었죠. 내 성을 따서 ‘신스 볼링장’이란 간판을 달았는데 손님이 정말 많이 왔어요.”

뭐 하나 망한 게 없네요.

“글쎄 그랬어요. 그런데 국회의원 선거에 나가서 떨어졌잖아요. 제 인생의 첫 실패였죠.”

그러다 은퇴 아닌 은퇴를 했어요.

“돈은 많이 벌었죠. 그런데 어느 순간 힘들더라고요. 피곤에서 달아나려고 초콜릿을 많이 먹어 당뇨까지 왔죠. 너무 열심히 달렸어요.”

어떤 직업인으로 남고 싶나요?

“수도 없이 받은 질문이에요. 그럴 때마다 가만히 생각해 봐요. 신영균 하면 영화배우지, 정치인 신영균이나 치과의사 신영균이 아니잖아요. 내 직업은 배우고, 나머지는 다 부업이에요.”

자신의 건강 유지 비법에 대해 들려주세요.

“새벽 6시에 일어나 밤 10시가 되기 전에 잠자리에 들어요. 매일 점심은 누군가와 식사를 하죠. 한 달 전에 약속을 다 잡아놔요. 대화를 하는 게 낙이죠. 담배는 원래부터 안 피웠어요. 어머니가 안 된다고 해서 따랐죠. 술은 젊을 때는 어쩔 수 없이 마셨지만 중년이 되면서부터는 거의 입에 안 댔고, 지금은 아예 안 먹어요. 철칙이 두 가지 더 있는데 오후에 2시간가량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하는 것과 다른 사람 험담을 하지 않는 점이죠. 나쁜 일 있으면 금방 잊어버리고 좋은 일만 생각해요. 오래 꽁하질 않아요. 그게 건강 비결 아닐까요?”

소식하시는 편인가요? 피부 관리는요?

“과식도 안 하지만 소식도 안 해요. 당뇨가 있으니까 단것은 안 먹고요. 피부 관리 같은 건 전혀 안 해요. 열심히 좋은 거 발라요(웃음).”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장면을 꼽아주세요.

“글쎄요. (잠시 침묵) 항상 좋았어요. 이북에서 어머니 손잡고 서울에 올 때도, 아버지가 없어서 어머니가 고생할 때도 힘들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 그저 그대로 열심히 살았어요. 인생은 아름답죠. 죽고 싶다, 이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네요. 인생이 엄청 짧아요. 사는 날까지 건강하게, 실수하지 않고 마무리하고 싶어요.”

나중에 자신이 누울 관에 무엇을 넣고 싶은가요?

“성경책 하나면 돼요. 가져갈 수도 없고. 가져가고 싶은 것도 없어요.”

이제 영화 찍자는 제안은 안 오나요?

“하하하! 하나 찍을까요?”